조우성 변호사의 내 얘기를 들어줄 단 한사람이 있다면 2권 원고 중
'갑질에 대응하는 우아한 을질(?)'
“조변호사님. 제가 몇 군데 알아봤는데 별 뾰족한 방법이 없다는 답을 듣긴 들었습니다. 그래도 혹시나 싶어서...”
실제 만난 것은 처음이지만 페이스북으로 친구관계를 맺었기에 서로 온라인으로서만 알고 있던 송 00(가명 ; 33세) 과장.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라며 만나자고 연락이 와서 회의를 하게 되었다.
송 과장은 알루미늄 프로파일 및 판재를 제조하는 중소기업 H사의 영업담당이다. 하지만 건설 경기가 시원치 않아 작년에 이어 올해도 송 과장의 영업실적은 좋지 않았다. 회사 내에서는 구조조정의 이야기도 흘러 나오고 있는 실정이어서 송 과장은 큰 거래 하나를 성사시켜야만 하는 절박한 상황이었다.
송 과장의 대학선배가 중견 기업인 I사를 송 과장에게 소개해 준 것도, 이러한 송 과장의 딱한 사연을 알고는 어떻게든 배려해 주기 위한 마음에서였다. 송 과장은 고마운 마음으로 선배가 소개해 준 I사의 구매 담당인 한 모 부장을 만나게 되었다.
I사는 업계 서열 2위를 자랑하는 탄탄한 회사였기에 송 과장으로서는 I사와 꼭 거래를 트고 싶었다.
“잘 됐네요. 우리 회사는 내년에 충남 서산에 공장을 하나 지으려고 하는데, 사양(spec)이나 조건이 맞으면 거래 못할 것도 없죠.”
의외로 처음 만난 자리에서 한 부장은 송 과장에게 선선히 대해 주었고 꽤 큰 거래가 있을 수 있다는 정보도 주었다. 한 부장의 말에 따르면 I사의 공장 신축에 H사가 자재를 납품하고 이를 설치하는 공사비로 예상할 수 있는 H사의 매출 규모는 대략 10억 원 정도였다. 송 과장은 그 동안의 영업부진을 만회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 부풀었다.
송 과장은 그 이후 다른 거래처 발굴은 일단 접어두고 오로지 I사와의 거래 성사에 집중했다. I사의 한 부장도 자신의 필요에 의해 수시로 송 과장을 불러댔다. 송 과장은 한 부장의 요청에 따라 제품의 사양에 대한 다양한 자료를 제출했고, 시제품을 제작하는 등 열심히 수주활동을 진행했다. 한 부장은 그 과정에서 은근히 접대받기를 원하는 눈치여서 송 과장은 개인 돈으로 한 부장에게 밥과 술을 사면서 환심을 사려고 노력했다.
그 날도 한 부장의 호출을 받은 송 과장은 I사를 방문했다. 그런데 한 부장의 표정이 평소와 달랐다.
“송 과장. 이거 어쩌지? 내가 거의 작업을 다 해놓았는데 갑자기 위에서 틀어버리는 바람에 이번 공사건에서는 우리가 H사 제품을 쓰기가 좀 어려울 것 같아.”
송 과장은 순간 얼굴에 핏기가 싹 가셨다. ‘이게 무슨 소리?’
송 과장은 이미 회사에 I사 프로젝트 진행을 알렸고, 조만간 좋은 소식을 전해 줄 것이라는 희망 섞인 보고를 올린 상황이었다. 그 동안 영업실적이 좋지 않았던 송 과장으로서는 이번에 한 건 제대로 실적을 올림으로써 그 동안의 부진을 만회하려는 의지가 컸었다.
“아... 한 부장님. 이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 이러면 큰 일 납니다. 그 동안 별 문제 없었잖습니까?”
송 과장은 절박한 마음으로 한 부장에게 매달렸다. 하지만 한 부장은 대단치 않은 일이라는 표정으로 말했다는 것이다..
“아니 뭐 우리가 계약을 한 것도 아니잖아. 나도 잘 해 보려고 그랬어. 그런데 회사 일이란 게 내 맘대로 안 되는 부분도 있잖아. 알 만한 사람이 왜 그래? 다음에 기회가 되면 내가 최우선적으로 송 과장을 찾을께. 이번에는 어쩔 수가 없구만. 이해해 주게.”
송 과장의 사연을 들어보니 나로서도 송 과장의 처지가 참 딱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현실적으로 이 문제를 타개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란 어려워보였다.
“한 부장은 왜 갑자기 마음을 바꾼 거랍니까?”
“제가 여러 경로를 통해 알아봤는데, 한 부장이라는 작자는 양다리를 타고 있었더군요. 아마 다른 회사로부터 무언가를 받았을 거라는 추측입니다. 제게 평소 하는 행동을 봐도 뭔가 대가를 바라는 눈치더군요. 하지만 저희 회사 사장님 방침은 영업과정에 뒷돈이나 리베이트를 챙겨주는 것은 절대 하지 말라는 입장이어서...”
“상담을 해 본 다른 변호사님들은 뭐라고 하시던지요?”
“네, 두 분을 만나뵜는데, 두 분 다 비슷한 말씀을 하시더라구요. 아직 저희 회사가 I사와 계약을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I사에게 계약불이행 책임을 물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한 부장이 사기를 치거나 협박을 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그에 따른 손해배상책임을 묻기도 어렵고.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없는 묘한 ‘사각지대(死角地帶)’에 빠진 형국이라고 합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렇게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송 과장님이 원하시는 건 뭔가요?”
“저로서는 I사 건이 잘 처리될 것처럼 회사에 계속 보고했는데 일이 이렇게 틀어지게 됐으니 정말 난감합니다. 제가 가장 두려운 것은 이번 일로 인해 제가 회사에서 문책을 당하는 겁니다. 아예 권고사직 처리될 수도 있습니다. 요즘 회사 분위기가 정말 안 좋거든요. I사를 설득해서 당초 규모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거래를 틀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정말 좋겠습니다.”
I사에서 구매의 칼자루를 쥐고 있는 한 부장은 이미 마음이 뜬 상황. 그리고 이미 다른 변호사들의 법률검토처럼 송 과장이 I사를 공격하기는 법적으로 쉽지 않은 상황. 쉽지 않은 문제였다.
이 또한 ‘갑질’의 한 종류인가 싶기도 했다. 송 과장을 보내고 계속 고민을 했다.
결과적으로 송 과장이 원하는 것은 I사와의 거래다. 그러기 위해서는 I사와 완전히 척을 져서는 안 된다. 특히 구매에 관한 키를 쥐고 있는 한 부장과의 관계에서는 더욱 그렇다. 하지만 한 부장은 이미 다른 회사에 발주할 마음을 먹고 있기에 어느 정도 압박을 주지 않고서는 송 과장의 말에 콧방귀도 끼지 않을 것이다. 압박을 주되 완전히 척을 지지 않는 방법을 찾아야 하니 난감할 노릇이었다.

결국 법률적인 주장 못지않게 협상적인 기법을 활용하는 것이 필요했다. 이틀 정도 고민을 한 끝에 어느 정도 방향을 잡은 다음 송 과장을 불렀다. 그리고는 ‘작전 지시’를 했다.
“송 과장님, 일단 이 방법밖에 없습니다. 한번 부딪혀 보시죠.”
설명을 들은 송 과장은 굳은 표정으로 한 부장을 만나러 갔다.
“한 부장님, 접니다. 갑자기 찾아뵙게 되어 정말 죄송합니다.”
여태껏 반가이 맞아주던 한 부장은 그 날 이후로 송 과장을 피하는 눈치였다. 그런데 약속도 없이 갑자기 찾아오니 얼굴에 싫은 표정을 그대로 드러냈다.
“거 참. 송 과장. 말귀를 알아먹을 만한 사람이... 내가 일부러 그러는 것도 아니고 말야. 이번에는 좀 곤란하니 다음에 같이 하자고 그랬잖소?”
“네, 부장님. 전 부장님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런데 그게 좀 애매하게 된 것이... 제가 사실 저희 회사 윗분들에게 I사로부터 수주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를 이미 해버렸거든요. 제 ‘입방정’이 문제입니다. 그런데 지난 번에 부장님이 이번 거래는 힘들다고 말씀주셔서 제가 회사에 그대로 보고했더니 저희 회사 감사님이 이건 문제가 있다고 그러면서 법적 조치를 취해야겠다고 그러더군요.”
“뭐요? 법적인 조치를 한다고? 우린 계약도 안했는데 무슨 법적 조치를 한단 말이요?”
“그러니까요. 전 사실 법을 모르니 어떻게 되는 건지 알 수 없는데 우리 대법원 판례에 따르면 계약을 안 해도 계약협상을 중간에 갑자기 일방적으로 중단하면 손해배상이 된다나 뭐라나... 우리 감사님이 그러셨어요.”
송 과장은 이런 말을 하면서도 최대한 한 부장 편에 서 있음을 보여주려 노력했다.
“그래서 제가 ‘한 부장님은 그래도 우리를 위해 애를 많이 써 준 분인데 법적으로 하시면 안 됩니다. 앞으로도 거래를 계속 해야하는데요’라고 저희 감사님께 말씀드렸어요. 그랬더니 감사님은 ‘그래도 그 동안 송 과장이 시간 쓰고 비용 쓰고 한 부분에 대해서는 그대로 넘기지 못합니다.’면서 I사 대표이사님 앞으로 다음 주에 내용증명을 보내겠다고 하시는 게 아닙니까?”
“뭐요? 내용증명?”
한 부장은 눈을 치켜떴다. 하지만 얼굴에는 불안한 빛이 역력했다.
“그래서 제가 ‘절대 내용증명은 안됩니다.’면서 강하게 막았답니다. 하지만 저희 감사님의 의지를 제가 꺾을 수는 없을 것 같아 걱정입니다. 제가 아까 몰래 감사님이 작성 중인 내용증명 초안을 참고 삼아 가져왔습니다.”
송 과장은 내가 작성해 준 내용증명 초안을 슬그머니 한 부장에게 건넸다.
“수신 : I사 대표이사 000
발신 : H사 대표이사 000
제목 : 계약협상의 일방적인 파기에 따른 손해배상청구의 건
1. 귀사의 일익건승을 기원합니다.
2. 당사 영업담당은 귀사 구매담당과 사이에 지난 2개월간 당사 알루미늄 프로파일 및 판재 공급 및 설치공사 계약체결과 관련하여 진지한 협상을 진행해왔습니다. 당사 영업담당은 귀사 구매담당의 요청에 따라 여러차례 제품 사양에 대한 프리젠테이션과 시제품 제작까지 진행한 바 있습니다.
3. 그런데 귀사 구매담당은 지난 달 10일경 정당한 사유 없이 계약협상을 일방적으로 중단시켰습니다.
4. 귀사와 당사는 아직까지 구체적인 계약을 체결한 바는 없으나, 우리 대법원 판례(99다40418 판결)에 따르면, 계약협상 교섭단계에서 상대방에게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계약이 정상적으로 체결될 것이라는 기대를 줘놓고서 상당한 이유없이 그 계약의 체결을 거부한 것은 계약자유원칙의 한계를 넘는 위법한 행위로서 불법행위를 구성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5. 이에 당사로서는 귀사 구매담당의 불법행위를 원인으로 한 손해배상청구를 준비 중에 있으며 이를 피보전권리로 하여 귀사의 부동산이나 매출채권에 대한 가압류 조치도 예정하고 있습니다.
6. 법조치를 진행하기 전에 귀사에 이러한 사항을 미리 알려두는 것이 필요하다는 판단 하에 이와 같은 통보서를 보내게 됨을 심히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2012. 6. __.
H사 대표이사 ____________“
한 부장은 그 내용증명을 한참동안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이런 내용증명이 우리 회사로 날아오면 내 입장이 뭐가 됩니까? 송 과장! 더구나 올 연말에 임원승진심사를 앞두고 있는데!”
“그러니까요. 부장님. 그래서 저는 어떻게든 막아보려 하는데 저희 감사님이...”
“음... 그럼 이러면 어떻겠소? 계약금액을 좀 낮춥시다. 전에 내가 말했던 금액이 10억 이었지요? 이번에는 5억 만 합시다. 이미 다른 업체에 말을 해 둔 것이 있으니. 그리고 다음에 좀 보완하는 걸로. 어때요?”
“아... 저야 그러면 좋지만 부장님이 힘 드시지 않겠습니까?”
“이런 내용증명이 우리 회사로 날아오면 안 된단 말이오. 어때요? 이 정도 선이면 회사 내에서 내용증명 발송을 막을 수 있겠소?”
“네, 부장님이 이렇게 애를 써주시는데... 제가 무슨 수를 쓰더라도 감사님의 내용증명 발송을 막겠습니다.”
만만치 않은 협상이었지만 송 과장이 잘 처리하는 덕에 해피엔딩으로 끝이 났다. 송 과장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계약 협상과정에서 부당하게 협상을 파기한 경우에도 일정한 요건에 해당하면 손해배상청구를 할 수 있다는 대법원 판례(99다40418 판결)를 찾은 것이 큰 힘이 됐고, 협상론에서 말하는 굿가이 뱃가이 전술, 즉 송 과장은 굿가이, 회사 내 감사는 뱃가이를 맡는 역할분담을 통해 상대방을 적절히 압박한 것 때문에 송 과장이 원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었다. 만약 한 부장이 끝까지 협상에 응하지 않았다면 송 과장은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위 내용증명을 I사에 보낼 수밖에 없었으리라. 하지만 한 부장이 적절히 양보하는 바람에 큰 불상사는 발생하지 않을 수 있었다.
갑과 을의 문제가 요즘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고 있다. 협상력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는 갑의 입장에서는 관계형성 및 관계단절에 있어 상대방을 너무 쉽게 생각하고 함부로 다루는 경향이 많다.
사실 법과 협상지식은 갑보다는 을에게 더 절실히 필요하다. 만약 위 사례에서 송 과장이 위 대법원 판례를 몰랐거나 굿가이 뱃가이 전술을 통한 내용증명 압박방법을 쓰지 못했다면 송 과장은 한 부장의 변덕 때문에 회사를 그만둬야 하는 불상사를 맞이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법은 약자를 위해 존재한다. 하지만 약자들은 법을 너무 멀리 있는 것으로 느낀다. 법을 너무 남용해서도 문제겠지만, 내가 처한 상황에서 나를 보호할 수 있는 법적인 논리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아는 것은 큰 힘이 된다.
‘아는 乙이 甲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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