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우성변호사의 소송에서 배우는 인생이야기 : 라뽀르, 공감의 힘
대학 후배인 정신과 전문의 신박사가 자기 손위 처남인 박사장에게 법률적인 문제가 발생했다고 해서 박사장과 함께 나를 방문했다.
박사장은 동업자와 사이에 이익분배 다툼이 발생했는데, 동업자가 먼저 박사장을 횡령죄로 고소했고, 박사장은 경찰로부터 소환을 받아 다음 주에 경찰서에 출두해야 할 상황이었다.
박사장은 회의를 진행하면서도 화가 나서인지 한숨을 쉬었다고 고성을 질렀다가 하면서 극도로 불안한 상태를 보였다. 하지만 변호사로서 그 사건을 봤을 때는 상대 동업자의 횡령죄 고소는 충분히 법리적으로 반박이 가능했다. 그래서 나는 차분히 횡령죄의 법리를 설명해 주고,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그리고 어떤 반박자료를 마련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알려 주었다.
박사장은 좀 더 생각해 본 다음 사건을 위임할 것인지 결정하겠다고 하고는 신박사와 함께 사무실을 떠났다.
2일 후에 신박사는 잠시 우리 사무실을 방문했다.
“선배님, 죄송한 말씀인데, 제 처남이 다른 변호사에게 사건을 맡겼다고 합니다. 선배님이 애써 시간 내 주셨는데 제 입장도 좀 난처하게 됐습니다.”
나는 손사래를 치며 “별 말을 다하는구먼. 어차피 사건이란 게 다 궁합이 맞아야 하는 거야. 나랑 자네 처남이랑 궁합이 안맞아서 그런 걸 뭐.”라며 웃었지만 속으로는 섭섭한 마음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다른 변호사라 하더라도 법리적으로 내가 설명한 것 이상의 설명을 하기는 어려웠을텐데.
“선배님, 혹시 ‘라뽀르(rapport)’가 뭔지 아세요?”
“응? 라뽀르? 처음 들어보는데?”
“선배님, 외람된 말씀이지만 엊그제 선배님이 상담하시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면서 선배님이 라뽀르만 좀 더 갖추시면 정말 완벽한 상담을 하실 수 있고, 의뢰인도 아마 선배님과 같이 일하고 싶은 마음이 더 들 것 같았습니다.”
이어 신박사는 궁금해 하는 나에게 라뽀르에 대한 설명을 해주었다.

라뽀르는 상호간에 신뢰하며, 감정적으로 친근감을 느끼는 인간관계를 말하는데, 상담과 정신치료에서 치료적 관계형성에 핵심이 되는 개념으로, 상담자와 내담자 간에는 좋은 유대감을 만드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저도 변호사 업무를 잘은 모르지만, 엊그제 상담의 경우 라뽀르 관점에서 본다면, 선배님은 의뢰인인 제 처남과 유대감을 갖기 위한 시도는 거의 하지 않았고, 오로지 사건에 대한 설명만 하셨습니다.”
“사건을 의뢰하러 온 사람에게 사건에 대한 해결책을 말해 주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거 아닌가?”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 처남은 동업자와의 관계 때문에 격정적으로 분노한 상황이었고, 본인이 억울하다고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라면 일단은 처남을 다독이면서 ‘충분히 그렇게 느낄 수 있다.
제3자인 내가 이야기를 들어도 화가 날 지경이다’라고 공감을 표시해 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람의 뇌는 파충류의 뇌, 포유류의 뇌, 영장류의 뇌로 구성되어 있다고 합니다. 사람이 화가 많이 났을 때는 본능에 충실한 ‘파충류의 뇌’ 상태가 됩니다. 그런 사람에게 아무리 논리적인 말을 한다고 하더라도 상대는 받아들일 자세가 안 되어 있습니다. 일단은 진정시키고 공감해 주면서 파충류의 뇌를 잠재운 다음 영장류의 뇌 상태를 만들어 놓고서 논리적인 설명을 해야 상대가 충분히 이해를 한답니다. 저 같은 정신과 의사들은 환자와 사이에 이런 라뽀르 형성을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데요, 변호사님들도 활용하시면 참 좋을 듯 합니다.”
흠.
처음에는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니 신박사의 말이 옳은 것 같았다. 변호사를 찾아오는 사람들 중 상당수는 ‘상처받았거나 분노한’ 사람들이다. 나는 그 사람들 앞에서 ‘자, 이렇게 하면 해결될 수 있습니다’는 식의 해결책 위주로 접근하기에 바빴지, 정말 그 사람들의 아픔에 대해 공감하거나 위로해 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신박사의 충고는 내가 의뢰인들을 대하는 방식에 많은 변화를 가져오게 했다.
예전에는 의뢰인이 상담을 하러 온다고 하면 우선 전화나 이메일을 통해 사건 내용을 먼저 전달해 달라고 요청했다. 나는 이렇게 전달받은 사건 내용에 대해서 검토를 한 다음, 나중에 의뢰인이 방문하면 간단하게 인사를 나눈 후 바로 사건에 대한 해결책에 대해 화이트보드에 써가며 열심히 설명을 하는 방식으로 상담을 진행했다. 철저하게 ‘해결책’ 위주의 접근이었다.
하지만 신박사의 충고를 들은 이후부터는 나는 상담하러 온 의뢰인의 사건 내용을 어느 정도 미리 파악하고 있더라도 처음 20분간은 무조건 의뢰인에게 직접 사건 내용을 다시 한 번 더 설명해 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그 20분의 설명을 들으면서 사건 내용 자체에 대한 파악 못지않게 의뢰인의 심리 상태를 면밀히 파악한다. 의뢰인이 상처를 받았는지 아니면 화가 나 있는지. 그리고 의뢰인이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돈? 화풀이? 정의실현?).
반월공단에서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황사장.
핵심 기술인력(최과장)이 경쟁사로 스카웃되어 가버리자 그 후속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지인의 소개를 받아 나를 방문했다. 나는 역시 처음 20분간은 대꾸만 하면서 황사장의 설명을 중점적으로 들었다.
황사장은 사건의 전말을 설명하면서 최과장에 대한 배신감을 여러차례 표명했다.
“그 자식이 말입니다, 나랑 고향도 같고 또 집안 형편도 많이 어렵고 해서 남달리 마음이 쓰였습니다. 대학교를 마치지 못한 것이 영 마음에 걸린다고 야간대학에 편입했었거든요. 중소기업에는 얼마나 야근이 많습니까? 하지만 저는 그 자식이 대학 졸업하는 거 보려고 야근도 많이 빼줬습니다.
일도 곧 잘 했기에 다른 직원들보다 승진도 빨리 시켜주면서 내 오른팔로 키웠습니다. 그 때문에 다른 직원들이 질투를 하기도 했지요. 하지만 전 우직하고 제 마음을 알아주는 것 같아서 그 친구에게 애정을 줬는데,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치다니...”
황사장은 분노하고 있었다. 나는 신박사의 조언을 떠올리며 사건에 대한 해결책, 즉, ① 최우선적으로는 부정경쟁방지 및 영업비밀보호에 관한 법률에 따라 과연 영업비밀로 보호되는 영업비밀에 해당되는지를 먼저 살펴 본 다음, ② 이전하려는 회사쪽에 영업비밀 침해가 될 수 있다는 내용의 경고장을 보내고, ③ 경우에 따라서는 전직(轉職)금지 가처분을 제기할 수 있다는 점을 설명하기 보다는 황사장의 감정에 공감하는 표현을 먼저 했다.
“정말 속상하셨겠습니다. 저 같으면 도저히 참을 수 없었을 것 같습니다.”
“거참,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는 것이 아니라더니... 옛말이 틀린 게 하나 없군요.”
“최과장 그 친구는 혼이 좀 나야겠습니다. 세상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 줄 필요가 있겠습니다. 사장님, 너무 심려 마십시오. 제가 어떻게든 한번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놀라운 일은, 내가 구체적인 해결책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는데도 황사장은 내게 일을 맡기고 싶다면서 무슨 서류에 도장을 찍고 가면 되는지를 물어 보는 것이었다. 예전 상담 방식과 비교했을 때 나는 훨씬 말을 적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의뢰인은 나를 신뢰하고 나에게 사건을 맡긴 것이다.
물론 황사장처럼 격정적인 의뢰인이 아니라 아주 차분하고 이성적으로 사건을 설명하는 의뢰인에게는 구체적인 솔루션과 통계치 등을 근거로 차분하게 설명을 해야 할 것이다.
유대감.
변호사로서 의뢰인과 공유해야 할 중요한 정신적 상태를 가르쳐 준 신박사께 다시 한번 고마움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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